그린뉴딜 담론의 과거와 현재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로서의 그린뉴딜은 2007년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의 칼럼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때는 원론적인 입장을 서술하는데 그쳤다. 이듬해 케인즈주의 경제학자 로버트 폴린(Robert Pollin)의 연구팀이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보고서 ⌜녹색 회복⌟을 발표했다. 보고서의 핵심은 그린뉴딜이 저탄소사회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함과 동시에 20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는 다시 경제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2008년~2009년의 그린뉴딜 안들은 ‘탄소환원주의(carbon reductionism)’의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탄소환원주의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질서 내에서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비용-효과적(cost-effective)인 방식으로 탄소배출을 줄이는 데 매진할 것을 요구한다. 반면, 오늘날 논의되는 그린뉴딜은 기후정의운동에 기반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하고 있으며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는 ‘순제로’(net zero) 탄소배출이 아닌 완전한 탈탄소화를 지향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환경문제를 인간의 책임으로 명시한 ‘인류세’(Anthropocene) 담론에서 책임 주체를 자본주의로 명시한 ‘자본세’(Capitalocene) 담론으로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세 담론은 녹색 케인즈주의에 기반한 그린뉴딜이 지닌 한계점을 드러낸다. 환경문제의 근본적 원인에는 자본주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색 케인즈주의는 여전히 자본, 성장, 체제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본주의에 입각한 환경문제 대응은 자연을 상품화하고 책임을 인류 전체로 보편화 한다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탄소환원주의를 수용한 그린뉴딜은 탄소배출권 판매와 탄소세 도입 정책이 빠지지 않는다. 탄소배출 행위에 시장 메커니즘을 적용시켜 면죄부를 만든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한 적이 없으며 우리들끼리 권리를 준다고 한들 자연이 납득하고 이상기후를 멈추는 것도 아니다.
탄소세는 오염자인 자본이 아니라 일반 대중, 특히 저소득층에게까지 불공평하게 부담을 지운다. 이것은 자본세 담론이 인류세 담론의 한계로 지적한 점이기도 하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인류세의 책임을 권력을 가진 백인남성에게 특정하기도 한다.탄소환원주의는 기후위기의 원흉인 자본주의와 그 체제의 수혜를 입는 소수의 재력가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류 전체에게 보편화시키는 사기극이다.
탈탄소화는 자연의 상품화를 조장하는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탄소배출권dlsk 탄소세는 없다. 대신 에너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한다. 기후위기의 책임과 부담을 거대 자본에게 직접 부여한다.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는 에너지 전환을 추구한다.
그린뉴딜 최신판은 자본주의암 말기에 대한 처방이다. 그린뉴딜 관점에서 인류세는 오진이다. 자본세가 정확한 진단명이다. 이제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물질적 황금기를 가져다준 자본주의를 원인균으로 규정한다. 자본주의에서 비롯되는 증상을 호전시키고 항체를 생성할 수 있을까.
비판
특집에 수록된 글 모두 방향은 제시하고 있지만 구체적 안은 없다. 어떻게 대중의 관심을 유도할 지, 연대할지, 공동체를 복원할지 말이다. 해외에서 수입된 담론을 끌어다가 설명한 수준에 그친다. 아직 그린뉴딜이 생소한 대중의 관점을 교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구체적 실천방안을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정치인이 정책을 발표하면 대안 없이 관점만 가지고 비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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