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바깥을 고른 이유
제목을 보고 문득 한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내게 서울은 어떤 의미일까. 등본의 주소지 첫머리에 위치한 시도 이름, 취업이라는 생계 수단을 손에 넣기 위해 자리잡은 둥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담긴 모교 소재지 등 서울이라는 단어에 붙일 수 있는 의미는 끝이 없었다. 그렇게 의미를 담아보다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났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서울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나를 소설 속 세계로 이끌었다.
일반을 극단적으로 비추는 거울
이야기는 ‘나’가 부자들이 사는 서울 소재 T팰리스에 들어서며 시작한다. 외부인 통제 절차를 거쳐 과외 수업이 있는 집에 도착한다. 학생의 엄마는 학생과 ‘나’를 분단위로 통제한다. 엄마와 학생의 목표는 수능 고득점, 인서울 대학진학이다. 집에 귀가한 ‘나’는 화장도 지우지 않고 침대에 눕는다. 부잣집 가정과는 상반되게 번번히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어머님, 학생, ‘나’라는 호칭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호칭에 속한 대게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장치다. 어머님은 재력을 갖췄다. 그것은 사회에서 성공을 이야기할 때 심심찮게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자기개발서들은 계획의 수립과 실천을 강조한다. 어머님은 재력을 갖췄으며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대표격인 것이다.
학생은 가정환경과 교육방향에 영향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을 대표한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강박증,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정해진 답을 찾는 질문, 입시를 목표로하는 교육에서 비롯된 의문 등 학생의 행동은 사회가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나’는 오늘날의 여러 통계를 개인의 속성으로 지닌 인물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년 5월 기준으로 취업시험 준비 인원이 71만 4000명이고 그 중 30.7%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롯데멤버스 리서치 플랫폼 ‘라임’이 발표한 명품쇼핑 현황을 보면, 19년 4월~6월 명품 구매 건수는 2017년 2분기보다 3.5배 증가했다. 특히, 20대 구매 건수가 두드러진다. 20대 구매 건수는 2년새 7.5배가 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대 우을증 환자는 2012년 대비 2016년에 22.2% 증가했다. 모든 연령대를 압도하는 상승폭이었다. 통계청의 2018년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작년보다 7.0% 증가했다. 6년 연속 증가했으며 상승폭은 역대 최대치였다. 공시생, 소비습관, 무력감, 사교육 종사자 등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최근 들어 부정적인 지표로 거론되는 몇 가지 통계자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에게는 우리 사회의 면면이 담겨있다. 그 면면이 극단적으로 묘사된다.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모두 서울에 산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서울에 살지 않는다. “서울 시내 4년제 대학에 입학하는 건 10퍼센트 남짓”이다. 그 안에서도 여러 개의 인서울로 나눠진다. 서울은 수직적이다. 그 수직적인 서울 밑바닥에 있거나 그 울타리 안에 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서울의 삶으로 느끼고 있을까?
서울의 의미
서울을 단순히 지명으로 사용한다면 서울의 인구는 어느 도시보다도 많다. 하지만 사는 지역으로 사회적 성공을 가늠하는 관점에서 따져보면 서울에 사람이 많을까? 우리는 서울이라는 단어에 주소지 말고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성공과 관련된 서울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 녹여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게 따져보면 서울에는 적은 수의 사람이 산다. 문턱이 높고, 폭은 좁은 입구 때문이다. 서울은 서울의 바깥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 도시다.
좁은 서울, 좁은 곳을 향해 가는 사람들
서울은 넓다. 그러나 들어가는 문은 좁다. 소설은 비좁은 공간 감각을 모든 인물에게서 드러내고 있다. 어머님은 분단위로 쪼개지는 비좁은 시간 속에 살며 자식의 수능 고득점을 바란다. 마찬가지로 학생은 비좁은 통제된 시간 속에 살며 인서울 진학을 희망한다. 시간도, 수능 고득점도, 인서울 진학도 모두 비좁다. ‘나’는 그런 좁은 가정에서 과외를 한다. 그런 ‘나’도 비좁은 공무원 시험 합격을 희망한다. 모두가 비좁은 곳에 살며 비좁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만성 서울 강박증
그 방향은 개인이 선택하지 않았다. 개인이라는 돛단배가 바다라는 세상에 던져졌는데 바람이 서울을 향해서만 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자연의 이치와 같다. 학생들은 서울 강박증에 시달린다. 소설 속에서 엄마와 학생이 하고 싶은 것은 인서울 대학 진학 밖에 없다. 그들의 다른 바람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름 없이 호칭만으로 등장하고 개인의 기호가 완전히 배제된 등장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은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와 학벌주의에서 자라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 우리 곁에는 대학을 가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서울이라는 상징적인 잣대가 따라다닌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그 잣대로 종종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 우리는 만성 서울 강박증에 시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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