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일상 있어요
출판시장은 대에세이 시대다. 교보문고 선정 2018년 베스트셀러10에는 에세이만 여섯 권이 올랐으며 1, 2, 3위를 에세이가 석권했다. 2019년도 에세이의 해였다. 2018년만큼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베스트셀러 1, 2, 3위는 모두 에세이가 차지했다. 베스트셀러 10위 권 안에 있는 에세이들의 제목은 대부분 문장형이거나 특정 분야를 암시하는 단어가 사용됐다. “여기 시시콜콜한 일상을 담은 책이 있어요~”하고 소개하는 제목은 없었다.
그런 트렌드를 무시하는 이단아가 에세이 시장에 툭, 튀어나왔다. 바로 박연준 작가의 산문집 『모월모일』이다. 나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뒤집어보고 두드려보고 비꼬는 걸 즐긴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에 골몰한다. 『모월모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기대가 차올랐다. 『모월모일』, 작가의 어느 날을 주워다가 모셔 놓았을 것만 같은 제목. 나의 일상에 점점이 놓인 여러 고민들을 저 작가도 했을까 싶었다.
모월모일에 당신이 마주친 그 고민, 그 감정, 그 일상
상처를 돌보는 방법, 한숨과 괜찮은 척이 더 쉬운 나이, 사람을 내 곁에 옮겨 심고 싶은 마음, 혼자이지 못해 누추해지는 시간, 환상 때문에 타인에게 받는 상처, 아빠의 청춘이 담긴 기타, 사람을 움직이는 힘 등, 『모월모일』에는 어느날 누구든 마주칠 수 있는 소소한 고민, 감정, 일상이 담겨 있다.
그 고민
“사람을 진짜 움직이는 건 조리 있는 주장, 지상 명제를 증명하는 논증이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는 어떤 진심, 감정에 호소할 때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박연준, ⌜당신의 귀를 믿어요⌟ 『모월모일』 , 문학동네, p.134
부- 부-, 진동하는 전화기.
스마트폰 액정에는 연락처에서 지워버린 익숙한 번호가 떠 있다.
잠깐 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 아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다.
나는 곧바로 대답한다.
“누구세요.”
아빠와 나는 강산이 두 번은 변했을 시간 동안 갈등하고 있다. 각자가 꽤 큰 결단을 하고 용기를 내어 화해의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책도 읽어보고, 교회도 다녀보고, 상담도 받아봤다.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왜 그럴까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결국 감정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실패했던 것이라고.
오랜 시간 갈등을 겪으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첨예한 대립에 가려 눈치채지 못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먼저라고 하는데, 알았다고 한들 수가 보이지 않았다. 진심에 호소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미 진심 너머에 분노와 원망과 미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시커멓고 새빨간 감정 덩어리는 진심에 기댄 서로의 호소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그 감정
“눈물보다 한숨이 더 쉽고, 한숨보다 괜찮은 척이 더 쉬운 나이가 되었다.”
박연준, ⌜스무 살 때 만난 택시 기사⌟ 『모월모일』 , 문학동네, p.47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때, 내 마음은 너무 여렸다. 회사 선배들이 쿡 찌르면 경련을 일으켰다. 몸은 투명한 어항과 같았다.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쉽게 눈물이 쏟아졌다. 씩씩거리며 억울함을 분출했다. 지적 한번에 집중력은 바닥을 쳤다. 비가 오면 젖고 눈이 오면 덮이는, 바람이 불면 풍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러면서도 죽지 않는, 마치 잡초 같은 시기를 보냈다.
지금 나는 사회초년생이라고 하기에는 경력이 있고 사회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린 애매한 위치에 있다. 그런 위치에서 나의 감정은 외부자극에 무뎌졌다. 이따금 감정이 솟구친다고 하더라도 몸은 마음을 잘 감췄다. 어른은 그런 거라고, 그렇지 못한 자칭 어른들에게 종종 그런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내심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눈물보다 한숨이 더 쉽고, 한숨보다 괜찮은 척이 더 쉬운 나이가 되었다.”
그 일상
“가끔 사람도 한 그루, 두 그루 세고 싶어요. 내 쪽으로 옮겨 심고 싶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흙처럼 붉은 마음을 준비하겠어요.”
박연준, ⌜사월⌟ 『모월모일』 , 문학동네, p.61
책가방을 메고 다니던 시절에는 마음 깊숙한 곳에 사람을 옮겨 심는 일이 쉬웠다. 교실에서 잠깐 딱지치기를 하고, 운동장에서 잠깐 공을 차고, 놀이터에서 잠깐 술래잡기를 해도 금방 친해졌다. 지금은 누군가를 옮겨 심는다는 게 얼머나 대단하고 또 번거로운 일인지 모른다. 어릴 때는 사람이 근처에 스치기만 해도 마음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랐다. 지금은 거름도 주고, 물도 뿌리고, 일조량도 조절해야 겨우겨우 싹을 틔운다. 그나마 자란 싹도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뿌리를 더 내리지 못하고 시든다. 누군가를 마음에 옮겨 심고 키우는 일이 어려워진만큼 일상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매력적인 사람이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가꾼다. 시를 음미한다. 소설을 경험한다. 에세이에 공감한다. 소중한 문장들, 생각들, 감정들을 마음의 토양에 뿌린다. 그곳을 비옥하게 하고 있다가 어떤 씨앗이 찾아 왔을 때 따뜻하게 품을 것이다. 그가 사랑에 목이 마를 때, 어느 시의 한 구절로 갈증을 달랠 것이다. 그가 강풍에 부러질 것 같을 때, 소설 속 주인공의 경험으로 단단하게 지탱할 것이다. 그가 뿌리를 맞잡을 동료가 필요할 때, 에세이의 감정으로 공감할 것이다. 그렇게 붉은 마음에 그를 옮겨 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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