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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묘비/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어른

어른

어른이 별건가. 
지가 좋아하지 않는 인간하고도 
잘 지내는 게 어른이지
-김애란, 「풍경은 쓸모」,『바깥은 여름』

  '나'는 어른들의 만족을 위해 골프에 대해서, 정치와 넥타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린왕자는 장미의 네 개의 가시에 관한 이야기가 나사를 푸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 치부되었을 때 얼굴이 빨개지며 화를 냈다. '나'는 어린왕자와 달랐다. 보아뱀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에 녹아들었다. 사하라 사막에 홀로 떨어지기 앞서, 어쩌면 그는 이미 사막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한채로 회색 사막에서 말라가는 '어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나'와 다르지 않다. 좋아해서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잘 지내기 위해서 좋아하는 척을 한다. 원만한 인간관계,  마땅한 사회생활이라는 명분은 인간이 가면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근거로 쓰인다. 그런 근거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듯 오늘날 어른이 된다는 건 관계를 우선순위 맨 위에 올려 놓고 자신을 잘 감추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어린왕자가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로등 켜는 사람을 빼고는 어른이 아니다. 어린왕자는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맑은 영혼으로 보였다.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쉬고 싶지만 '명령'에 따르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모두를 신하로 생각하는 것,  허영심이 가득찬 것, 행성을 소유하는 것, 술을 마시는 것, 지리학서적을 집필하는 것,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의 주체임이 분명했다.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상사의 부름에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회사원의 모습이다. 수업이 재미 없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출석일수를 채우고 성적을 관리해야 하는 학생의 모습이다. 슬픈 일이 있어도 친절하게 고객을 맞이해야 하는 전화상담사의 모습이다. 여섯 살에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골프와 정치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어른이고 싶지 않다. 가로등을 켜는 사람이 어른의 모습이라면, 나는 완강하게 어른이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장미꽃의 가시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고 싶다.  보도블럭 틈 사이에서 피어난 민들레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야만 해서 일어나는 사람 보다는,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나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끌어안고 살고 싶다.